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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물질과 정신,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by 아스떼


 [내 이름은 빨강]은 몇년전에 오르한 파묵이 유명해지면서 재밌게 읽었던 소설이다.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오랜만에 다시 책을 손에 집었는데, 여전히 흥미롭고 강렬하며, 여전히 아름다웠다. 모든 재미있는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2권이라는 길이가 무색하게 순식간에 읽었다. 
 오래전에 읽었을 땐 살인사건과 범인의 정체, 오스만 제국 예술작품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금색과 빨강의 색채감이 뚜렷하게 기억에 남았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었을 때는 예술작품의 아름다움보다도 새로운 화풍과 고전 화풍속에서 갈등하는 오스만 제국 세밀화가들의 고뇌가 기억에 남았다. 수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책을 읽은 감상이 이렇게 다른 걸 보면 좋은 책은 여러번 읽어서 곱씹어야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내 이름은 빨강]은 표면적으로는 세밀화가 엘레강스의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화가들과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을 그리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베네치아의 화풍과 이스탄불 고전 화풍의 갈등을 표현한다. 베네치아 화풍의 도입으로 인한 세밀화가들의 고뇌는 단순히 화풍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작품 속의 갈등은 그림의 물질적인(베네치아 화풍) 측면을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정신적인(고전 화풍) 측면을 중시할 것인가의 문제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인간중심적 사고관(베네치아 화풍)과 신적 사고관(고전화풍) 중 어느것을 선택해야하는 가에 대한 문제로 나아간다. 
 세밀화가 뿐만 아니라 진상을 조사하는 '카라', 화원장 '오스만', 작품 주관자 '에니시테'까지 등장인물 중 어느누구도 이 고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결국 어느 화풍도 선택하지 못하고 자멸하는 범인의 모습을 통해서 어느 가치관에도 정답은 없음을 은연중에 독자들이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명확하게 선택하지 못하고 두 가지 가치관에서 방황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여자주인공인 '세큐레'의 행동에서 극대화되는데, 남편을 전쟁에서 잃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는 세큐레는 탐욕스럽지만 부유한 '하산'과 능력과 예술적 소양을 가지고 있는 '카라'사이에서 방황한다.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선택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을 극단까지 시험하고 재는 '세큐레'의 모습은 물질과 예술, 사랑과 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밀화가들과 동일하다. 

 어린시절 이 책을 읽고 난 감상은 범인의 정체와 아름다운 예술세계에 대한 놀라움이었는데, 몇 년을 훌쩍 뛰어 읽은 이 책의 감상은 그때와 너무도 달라서 놀랍다. 그 어떤 추리소설보다도 어려웠으며, 닫힌 결말에도 불구하고 결말의 아련함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다. 다음번 이 책을 읽었을때는 또 어떤 감정을 느낄지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 저는 그저 한 그루 나무이기보다는 어떤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P.96

- 지금 보고 있는 순간이 끝없이 길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본다는 건 기억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P.321